3월 9일 오전 10시. 《민족21》 취재단은 북녘 영화의 메카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찾았다. 취재 차량이 평양 중심부를 벗어나 서북방향으로 20분이 넘도록 달렸다. 한산한 농촌 풍경이 창밖으로 이어지더니 형제산구역에 들어서자 오른편으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정문이 한눈에 들어왔다.

촬영소 부지 안으로 움직이자 왼편으로 카메라를 든 영화부문 일꾼들과 함께 한 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촬영소 전체를 굽어보는 가운데 촬영소 성원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취재단은 이곳에서 북의 대표적인 영화배우 리영호를 만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꽃샘추위가 몰려와 쌀쌀한 날씨였지만 그를 만난다는 사실에 기자는 살짝, 봄볕같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영화예술촬영소장과 해설강사의 안내로 사적관을 먼저 둘러보았다. 그때까지도 기다리는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사적관을 나와 차에 타려는데 촬영소 입구 반대편에서 검은 외투로 몸피를 감싼 한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멀리서도 그의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얼굴은 단박에 눈길을 끌면서 클로즈업됐다. 배우는 멀리서도 빛이 난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가 차츰차츰 다가오자 미리 준비해 둔 인사말이 머리 속에서 하얗게 사라져 갔다.

모두가 반해버린 ‘홍길동’, 리영호

“반갑습니다. 제가 리영호입니다. 먼 길을 수고로이 오셨습니다.”
나지막하지만 뚜렷한 음성으로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매끈하게 깎은 듯한 얼굴선, 짙은 눈썹, 굵은 쌍꺼풀 아래로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를 보며 기자는 남쪽에서 상영됐던 〈살아있는 령혼들〉(2000)을 다시 떠올렸다.

짐승처럼 자기들을 부려먹는 일본 군인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만으로 혀가 잘려 벙어리가 된 청년. 영화 속에서 그는 까맣게 탄 얼굴에 검댕을 묻혀가며 손짓 발짓으로, 온몸으로 싸웠다.
일본 해안가에서 우키시마호가 폭파되어 사정없이 밀려드는 바닷물 속을 헤쳐나가며, 마지막까지 힘을 다했다. 분노와 좌절이 뒤범벅된 눈으로 그가 화면을 가득 채웠을 때, 이글거리는 화산 같은 감정을 오롯이 마주했다. 그리고 죽어간 선배와 동료를 추모하며 마지막 추억의 끈인 빨간 댕기를 바다 속으로 보낸다.

그런데 현실에서 만난 그는 너무나 소탈한 모습으로 속삭이듯 말을 걸어왔다. 그는 재일동포 출신이다. 1963년 일본에서 태어나 4살 때 부모를 따라 평양으로 왔다.
영화배우 리영호는 첫 영화 〈홍길동〉(1986)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홍길동은 20년이 넘었지요. 대학생 때였으니까요. 아주 오래 전이죠. 사실 그때는 아이 때였어요. 지금 돌이켜 보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20년의 세월, 어느덧 그의 나이는 마흔 셋. 하지만 투명하기까지 한 그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반 평양 시민의 기억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방북 기간 동안 만난 북녘 여성들은 배우 ‘리영호’ 대신 ‘홍길동’으로 그를 칭했다. 리영호를 만났다는 기자에게 그들은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반할 만 하지요? 〈홍길동〉에서 워낙 인상에 남았으니까 다음 영화에서도 다 홍길동으로 통한단 말입니다.”
“리영호, 홍길동 말이지요? 지금은 나이가 들었지만, 그땐 정말 우리 언니들이랑 대단했습니다.”

〈홍길동〉이 상영될 당시 그의 인기는 지금 남녘으로 치자면 배용준, 원빈 정도와 맞먹는다 해야 할까? 일약 최고의 미남배우로, 시대의 연인으로 떠올랐지만 그는 “영화를 지망한 적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고 했다.

당초 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닮아 ‘기술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금성제2중학교를 거쳐 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던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때 평양영화대학(현 평양연극영화대학)으로 옮기면서부터다. 

촬영소까지 찾아오는 팬들

“동무들이랑 주변에서 자꾸 한번 해 보라고 해서 호기심으로 우연히 배우 모집에 참여했는데 그만 그렇게 됐죠. 처음에는 특별히 영화배우가 된다는 생각보다는 아무 데서나 일을 똑똑히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첫 영화를 하고 두 번째 영화를 하며 기왕 이렇게 된 것, 해 보기로 각오가 굳어졌습니다.”

그는 인생의 방향을 180도로 바꾼 ‘사건’을 너무도 담담히 설명했다.
평양영화대학으로 옮겨 입학수속을 밟고 있을 때, 대학에 온 연출가들이 그를 불러 세웠다. 어디에, 몇 시까지 나타나라고 해서 갔더니 그에게 〈홍길동〉 대본이 떨어졌다. ‘이제 이대로 찍는다’는 말에 말문이 막혔지만 악착같이 애쓴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지금 생각에는 그저 힘들었다, 그 추억밖에 없습니다. 하하하….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런 것 밖에 없었지요. 강의는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고, 영화의 ‘영’자도 모를 때니까요. 옆의 사람들이 다 좋은 분들이어서 유치원 아이에게 글을 가르쳐 주듯이 나한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분들 덕분에 영화를 찍었지요.”

겸손하게 말했지만 〈홍길동〉은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등장은 북 전역에 ‘홍길동 신드롬’을 몰고 왔다. 여성들은 한 배우의 등장에 열광했고, 남성들은 무술 열풍에 휩싸였다. 몽골과 베트남 등에도 영화가 수출되어 북녘판 ‘한류열풍’을 만들기도 했다.
단 하나의 영화로 이룬 거대한 성공. 그만한 인기를 얻었다면 극성팬이 생길 만도 하다. 너무 남쪽식으로 생각한 건 아닐까 싶었지만 내친 김에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팬들로부터 편지를 받기도 합니까?
“한 달에 10통씩은 정상적으로 오고 있습니다. 영화촬영소까지 찾아오는 분들도 있어요.”

▶촬영소까지? 이름난 배우인데 찾아온다고 해서 얼굴이나 제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촬영소를 둘러보고 사진을 함께 찍고 한참을 이야기하다 돌아가곤 합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녘에서 배우는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자라지만, 대중의 시야 속에서는 비껴서 있는 이들. 화려한 장막을 걷어낸 일상을 일반인에게 드러내길 꺼린다. 북녘의 배우는 달랐다. 저 하늘의 별처럼 멀리서 자신을 감추며 신비감을 만들기보다 스스럼없이 대중들과 어울리며 그 속에서 존재감을 찾는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기자가 북녘 여성의 열광적인 반응을 고려해 ‘찾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이 아니냐’고 넘겨짚었다. 그러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그건 5 대 5 비율입니다”라며 웃어 보였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좋아하고, 군인들도 좋아하고 다 좋아합니다. 힘들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래서 그때마다 힘을 얻지요.”

현장에서 숙식하며 촬영한 영화

그 뒤로 20여 년 동안 찍은 영화만 30여 편에 달한다. 잊을 수 없는 작품은 없었을까?
“역시 첫 영화인 〈홍길동〉이지요. 또 하나 꼽는다면 〈줄기는 뿌리에서 자란다〉라는 작품입니다. 실지 생활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내가 맡은 역은 망나니, 탄부 역이었습니다. 망나니 대장이 결심을 하고 자기 패거리를 모두 일으켜 세운다는 내용입니다. 현장에 내려가서 촬영을 하면서 실제 탄부들과 한 막장에서 함께 먹고 자고 일하면서 영화를 찍었습니다.”

때론 현실의 힘은 상상력의 힘보다 드라마틱하다. 〈줄기는 뿌리에서 자란다〉(1998)는 평안남도 안주지구 탄광련합기업소 칠리탄광 차광수 청년돌격대 대장을 원형으로 만든 영화다. 한때 폭력 조직의 두목이었던 주인공 ‘망나니’가 과거를 반성하고 옛 친구들만으로 청년돌격대를 조직해 제일 어렵고 힘든 과제를 맡아 임무를 완수한다. 영화는 곡절 속에서도 ‘망나니’와 그의 친구들이 스스로의 삶을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남쪽의 영화가 한 가지 사건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한다면, 북쪽의 영화는 사실적인 기록에 집중한다. 대본이 나오고 인물을 형상하고 촬영을 하기까지 그는 현장에서 호흡하고 인물을 만나며 삶의 진정성을 찾아 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것이다.

“지금도 그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평양에 올라오면 항상 만나게 됩니다. 당시 ‘망나니 패거리’ 모두가 지금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진하게 배어 나왔다. 현실에서 느낀 감정은 영화 속에서도 온전히 드러났다. 북 영화계에서 그는 “대사형상에서 생활에서처럼 자연스럽고 진실하게 할 줄 안다”라는 평을 받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줄기는 뿌리에서 자란다〉에 출연한 그의 연기를 보고 “연기를 과장하지 않고 보는 사람들과 같이 말하고 웃으며 생활하는 것처럼 생동하게 형상하는 배우”라면서 “그의 연기에 반했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의 찬사는 북쪽의 배우로써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 그런 그이지만 지금은 병을 얻어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 회한 가득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촬영 과정은 중노동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렇게 정장을 입는 일도 일년에 몇 차례 없고, 항상 작업복 차림이지요. 자칫 건강을 소홀히 하면 인차 몸이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측면을 무관심했지요. 마흔이 넘어서까지도 잘 몰랐어요. 힘이 넘쳐 났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재작년부터는 조금씩 느끼게 됩니다. 장군님께서 저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직접 지시해 주셔서 지금 정부병원인 남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만둘 것까지 고민했던 이유

그는 어떤 때 배우로서의 보람을 느낄까? “그저 인민들이 좋아한다면 만족한다”는 그는 소망마저도 소박하다. 그들에게 기쁨을 주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다만 기쁨의 종류는 남쪽과 다른 것 같다.

“우리는 상업적인, 팔기 위한 영화를 반대합니다. 영화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항상 생각하며, 그것을 고려한 방향에서 영화를 창작합니다.”

북의 영화에서는 남의 영화와 달리 한 사람에게 집중된 스포트라이트나 찰나적인 화려함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인물과 서사가 메운다. 서사에는 물론, 북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점이 배어들어 있다.
북의 영화처럼 그의 하루도 정갈하다. 촬영이 없을 때에도 조선예술영화촬영소로 출근하며 책을 보고, 연기 연습을 늦추지 않는다. 이런 일상은 북의 영화배우들에게 주어진 몫이기도 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연기연습과 끝이 없는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영화배우의 숙제는 화려한 조명 뒤에 숨은 난감한 주제였다. 배우로써 그는 그 난감한 주제에 매달렸지만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한때 ‘그만둘 것’을 생각하면서까지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 성미가 우울한 편이란 말입니다. 사람들하고 말하기도 싫어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책 읽고 그림도 그리는 게 취미입니다. 체육도 집단종목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수영하고 스케이트 같은 개인종목을 좋아했지요. 그 때문에 연출가 선생한테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만둘 것인가 초기에 많이 고민했지요. 지금은 성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북 배우와 함께 걸은 ‘남조선거리’

그는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무수한 사람을 만나고 토론을 거듭했다. 인간에 대한 탐구는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배우의 힘은 인간의 내면 속 깊은 곳에 숨겨진 진면목을 탄부처럼 캐내고 그것을 읽어내는데 있다고 한다면 그의 고민은 어쩌면 한 인간으로서, 배우로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지금까지 맡았던 역 중 ‘부정’을 형상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잘못하면 실패하기 쉽고 부정이라고 하면, 이쪽에서 볼 때 부정이고, 저쪽에서 보면 영웅이지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배우로서 그는 인간을 그 자체로 온전히 이해하려 노력하는 듯했다. 인간이라는 화두를 가슴에 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동안 북쪽 영화와 북쪽의 배우들이 한 가지 목표를 향해 기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남쪽 일부의 견해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삶의 면모는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그 삶을 파고들다 보니 그는 “할수록 힘든 것이 영화”라고 토로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배우로써 일해왔지만 영화는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고 했다.
그가 수없이 ‘어렵다’는 말을 쏟아 놓으면서도 원래의 꿈을 포기하고, 영화배우의 길을 가는 이유는 뭘까? 

“글쎄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봐야 되겠지요.”

‘까르르르’ 소리가 즐거운 봄날의 데이트를 깨트리며 영화배우 리영호와 기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만치 영화 촬영을 위해 나온 한 무리의 꼬마들이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야외세트장 거리에서 장난을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일행을 향해 갸웃 고개를 돌리며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향해 그 역시 손을 흔들었다.

“하하하하, 장난꾸러기들이구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전혀 모르는 꼬마들임에도 그는 아이들이 보내는 작은 함성에도 기꺼워하며 아이들의 머리라도 쓰다듬으려는 듯, 선뜻 앞으로 나갔다. 유명 영화배우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데 격식을 차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낯설지만 신선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남조선거리’를 걷고 있었다. 북의 영화배우와 남의 기자가 북녘 땅의 남녘 거리를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봄볕이 시샘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한편에선 이 진지하고 흥미로운 배우를 남녘 관객들도 만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최근 홍석중 선생의 소설 《황진이》를 모태로 남북합작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불가능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겠지요. 차례진다면 저도 어떤 배역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찍겠습니다”

어느새 봄날의 짤막한 데이트는 끝날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헤어지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민족 스물하나’라는 이름은 뜻이 깊게 지은 것 같습니다. 분단민족이 아니라 통일민족이라는 의미겠지요. 더욱 힘차게 해 주십시오. 여기서 항상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 만났던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찍겠습니다.”
차량이 출발하고 점점 멀어지는 가운데도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모습이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안의 점 하나로 작아져만 갔지만 만남의 여운은 더 커지고 있었다. [61호, 민족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