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남측 극장에서 개봉돼 화제를 모은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영국 영화 〈오만과 편견〉은 로맨틱 코미디의 교본으로 알려져 있다. 부제가 친절하게 알려주듯이 이 영화 제목은 ‘사랑이 시작될 때 남자와 여자가 빠지기 쉬운’ 오만과 편견을 시사한다.

딸 다섯을 내로라 하는 집안에 시집보내는 일을 일생의 과업으로 아는 베넷 부부와 각각 개성이 넘치는 베넷가의 다섯 딸, 그리고 이웃 성의 주인인 빙리와 그의 친구 다시가 영화를 끌어간다.

특히 무뚝뚝하고 지적 오만에 빠져있는 다시(매튜 맥파든)와 부자들은 오만하다는 편견으로 가득한 엘리자베스(키라 나이틀리)의 감정적 혼돈과 고백, 결혼에 이르기까지 오해와 갈등은 이 영화의 뼈대이자 볼 거리다.

결혼에 목을 매는 언니와 동생들에 비해 조금은 소년의 이미지를 가진 엘리자베스는 독서광이자 콧대 높은 여성으로 오직 사랑만이 결혼의 조건이라고 믿는 낭만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녀의 눈에는 딸들의 신랑감을 찾아 좋은 집안을 수소문하는 어머니가 속물처럼 보이기도 하며, 언니 제인과 빙리의 결혼을 반대한 다시가 지적 오만에 찬 그저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 

솔직하고 과감하며 유머 있는 엘리자베스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무뚝뚝한 성격과 자존심 때문에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엘리자베스를 당황시켜 자꾸 오해를 만들어버린 다시는 그러나 알고 보니 예술적 소양과 관대함까지 갖춘 섬세하고 다감한 청년이었다. 엘리자베스 역시 다시에게 호감을 갖지만 부자들에 대한 편견이 그녀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만들지 못한다.

이렇게 자존심 강하고 나름대로 개성이 뚜렷해서 평범하게 살지 못하는 남녀가 어떻게 상대를 받아들이는가 하는 이들의 관계 맺기와 18세기 결혼의 풍속사를 그린 것이 〈오만과 편견〉이다. 여기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이 하나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콧대 높고 자존심 강한 여자가 결국은 결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 장르의 목표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자의식 강한 여자와 참견하기 좋아하는 남자

〈홍반장〉의 원래 제목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다. 그렇다. 홍반장(김주혁)은 마을의 궂은 일, 좋은 일은 물론 아주 사소한 심부름과 잡일까지 일당 5만 원, 반나절 2만 5000원에 해주는 아주 바쁜 ‘백수건달’이자 마음씨 좋은 30대 청년이다.

그렇기에 치과의사 혜진(엄정화)이 강한 자존심 때문에 이 병원 저 병원에 사직서를 내고(혹은 쫓겨나고) 바닷가 한적한 마을에 치과를 개업하려고 찾아왔을 때도 부동산 업자를 대신해 사무실을 소개해준다. 그 후에도 그는 하루는 페인트 공으로, 다음날은 택배 배달원으로, 그리고 다음날은 데이트 나간 편의점 점원 대신 혜진과 마주친다.

이에 비해 혜진은 서른의 나이에 이르도록 결혼은 못했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똑똑하고 자기 주장 강한 ‘고소득의 전문직’ 치과의사다. 혜진은 타협할 줄 모르는 자존심 때문에 서울의 좋은 병원들에서 골치 아픈 말썽꾸러기로 낙인 찍히고 바닷가 마을로 들어왔다.

그러니 첫 만남부터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가 하면 마을의 반장을 자처하며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는 홍반장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혜진의 마음속에는 소녀 같은 사랑에 대한 기대도 있건만 친구들의 말마따나 ‘웬만한 남자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여자인 것이다.

〈따뜻한 우리 집〉(2004)의 림영준(박성욱)은 늘 남들보다 먼저 출근해 사무실 청소를 도맡아 하는가 하면 동료들의 편의를 봐주어 대신 근무를 하고 부식물 배달과 같은 잔심부름도 마다하지 않는 평양산원의 노총각 의사다.

그런가 하면 송연희(주금향)는 유학까지 갔다 오고, 서른이 넘었지만 사랑도 결혼도 학위논문을 딴 이후에 하겠다며, 의학원에 다니다가 임상실험 차 평양산원에 온 자의식 강한 여성이다. 이런 연희에게 늘 남의 일이나 돌봐주는 영준은 실력도 없이 ‘붙임성과 성실성으로 남을 감동시키는’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이미 유치원생 딸을 둔 연희의 친구는 연희에게 남자가 안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연희의 까다로운 성격이 남자들을 물리치기 때문이라며 그녀를 걱정한다.

홍반장과 혜진, 영준과 연희,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났으니 갈등은 예고되어 있다. 홍반장은 중소도시인 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도시 처녀 혜진에게 부드럽게 살라고 충고한다. 혜진이 자장면 하나를 배달시키자 음식점에 직접 가서 음식도 팔아주면서 주인과 친해지고 얘기도 나눠야지 치과 손님도 늘 것이 아니냐는 것.

게다가 매달 두 번 있는 마을 청소하는 날, 감기 몸살을 핑계로 빠지려는 연희를 강제로 끌어내 마을사람들과 함께 일하도록 한다. 개인주의적인 도시생활에 익숙한 연희에게는 홍반장의 그런 충고와 요구들이 지나친 간섭이자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연희는 “남 걱정 말고 댁이나 잘하쇼”란 말로 홍반장의 충고를 무시한다.

영준은 연희가 외국어 원서를 보는 것을 보고 오전에 2시간씩 동료들에게 외국어 학습반을 조직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그런가 하면 회의 시간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의견을 말하라는 과장의 말에 영준은 계속 연희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것을 따지는 연희에게 “어쩐지 동무에게는 자꾸 말해주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개인주의적인 외국생활에 익숙한 연희에게는 충고를 개인적으로 조용히 해주지 못하는 영준의 무심함과 학위논문도 써야 하는데 자꾸 외국어 학습반을 조직하자는 그의 요구가 마땅찮다.

자의식과 당당함, 개성과 의지로 똘똘 뭉친 혜진과 연희에게 자신들이 그렇게도 무시했던 홍반장과 영준이 필요해지는 사건이 생긴다. 혜진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데 오히려 사고를 낸 쪽이 뻔뻔하게 나오면서 여자라고 무시하자 혜진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상대방 차를 되받아 버린다.

변명의 여지 없이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 혜진 앞에 나타난 것은 홍반장. 경찰과의 친분을 동원하고 상대 차 주인과 합의로 사고를 마무리한 것. 그런가 하면 혜진의 치과에 나타난 건달패들을 꼼짝 못하게 해 혜진을 안전하게 지켜주기까지 한다.

연희는 친구의 소개로 무역업을 한다는 청년과 근무 중 잠깐 선을 보러 가는데 영준에게 자신의 빈자리를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또 수도가 고장나서 수도국에 항의해보지만 사람이 없어서 못 보낸다는 말만 듣고 있는 차에 영준이 직접 방문해 연희가 데이트 나간 사이 수도를 고쳐준다.

특히 연희의 데이트 신과 수도를 고치는 영준의 교차편집은 영준의 성실성을 관객에게 부각시킨다. 게다가 연희가 열쇠를 잘못 주고가 영준은 집에도 못간 채 연희네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남의 일이나 돌봐주는 어리석은 바보인줄 알았던 그 남자, 홍반장과 영준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녀들에게 새로운 모습은 다가오는 것이 영화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홍반장은 마을의 잡일을 봐주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지만 실제는 일당으로 받은 돈으로 자기만의 배를 만들어가며 꿈을 키우고 있었다.

초등학교 이전 부모를 교통사고로 모두 잃고 마을사람들에 의해 공동으로 키워지다시피 한 그는 이 마을을 지키며 마을의 잡일을 거들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홍반장의 빼어난 노래 솜씨와 책으로 가득한 창고방은 그의 예술적·지적 감수성을 증명해주면서 홍반장이 치과의사 혜진의 짝이 될 만한 청년임을 암시해 관객의 기대를 높여 놓는다.

거기에 혜진 아버지의 돌발적인 호출에 혜진의 ‘가짜’ 남자 친구가 되어 혜진 아버지와 바둑을 두며 친분을 쌓는 모습은 혜진이 홍반장에게 다시 한번 감동하는 계기가 된다.

사랑을 느끼며 공동체에 녹아드는 싱글 여성

한편, 외국인들이 평양산원을 방문하자 연희가 통역으로 차출되는데 외국인의 질문에 영준이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대답하는 모습을 통해 영준 역시 콧대 높은 연희 못지않은 재원임을 관객에게 확인시키며 연희에게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간다.

영준이 함께 살고 있는 형과 형수 역시 그의 친형이 아님에도 아파트를 나눠 쓰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남들이 모두 꺼리는 기술혁신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분투하는 영준의 성실성은 물론, 동료들이 영준에게 하나씩 선물을 마련해 말끔하게 정장을 해 입히자 영준은 어느 신랑감 못지않은 준수한 외모로 변신한다.

이쯤 되니 혜진과 연희는 속이 탄다. 백수건달 홍반장이 알고 보니 자신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그런 연인이었다니.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듯 혜진은 홍반장에게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밝힌다. 그러나 혜진의 고백이 지나가는 열차의 소음으로 관객에게 들리지 않듯이 홍반장에게 전해지지 않고 거절당한다. 연희는 자신의 학위논문을 영준에게 건네주며 봐달라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전한다.

혜진의 프러포즈를 거절했지만 홍반장의 마음은 편치 않다. 사실 홍반장도 혜진이 자신을 찾아올 날을 기다리며 혜진이 좋아하는 와인을 찬장 가득히 모아 놓고 있었다. 혜진 역시 친구들의 파티에 갔지만 마음은 홍반장에게만 가 있고 결국 홍반장에게 달려온다. 영준과 연희는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아침 청소를 함께하는 것으로 두 사람의 결합을 시사한다.

이러한 결합은 결혼을 않겠다던 자의식 강한 전문직 여성이 어수룩한, 그러나 알고 보면 ‘진짜 남자’를 만나 공동체에 편입되는 것을 상징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혜진은 처음 바닷가 마을에 와서 마을사람들과 얘기도 나누지 않고 청소도 하지 않았으며 도시적인 생활습관을 그대로 간직했었다. 혜진이 도시에서 특별히 주문해서 마시는 와인은 홍반장의 소주와 대비되면서 그녀의 이질성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다.

연희 역시 다른 직원들과 달리 여우털이 달리 빨간 모피 차림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점심시간에 모두 도시락을 놓고 웃으며 대화하지만 한마디도 그들 대화에 끼지 않는 것으로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혜진과 연희가 홍반장과 영준에게 사랑을 느껴가면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도 좀 더 안정적으로 적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혜진은 영화의 처음 부분에 홍반장이 그랬듯이 마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을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고, 연희는 과장에게 먼저 외국어 학습반을 맡겠다고 자청하는가 하면 자기만족적인 논문이 아닌 현장의 요구를 담은 논문으로 다시 쓰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영준이 공장에 있는 사이 연희가 싸온 도시락은 그녀가 얌전한 신부의 역할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의 다른 영화이지만 이렇게 하나의 장르에서 비슷한 요구를 보여주고 있다. 결혼도 출산도 거부하는 미혼의 전문직 여성은 가부장제  공동체에 위험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그런 그녀들에게 적당한 신랑감을 찾아주는 것, 그래서 콧대 높은 그녀들이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결혼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 장르의 목표인 것이다.

[63호, 민족21] 이명자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