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새해를 얼마 앞둔 지금, 《민족21》이 그를 찾은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다. 이즈음, 화려했던 과거의 스포트라이트 아래 머물러있는 줄만 알았던 그의 이름을 뜻밖에도 총련의 한 재일동포를 통해 듣게 된 것이다. 현재 그가 일본 동포사회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아니, 나이 쉰을 훌쩍 넘긴 그가 지금에 와 돌연 한류스타로 거듭나기라도 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대체 어떤 연유에서일까.
“생전 나는 그런 환영을 받아 본 적이 없어. 남쪽에선 그렇게들 잘 안 하니까. 현수막에 ‘한돌 동지를 열렬히 환영합니다’라고 써서 걸어놓았는데, 그 ‘동지’라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고. 몸 둘 바를 몰랐지. 내가 그만 상기되어 가지고는 답가로 〈홀로아리랑〉을 부르는데, 결국 끝까지 부르지도 못했어… 목이 메여서.”
지난 10월 13∼20일, 총련의 초청으로 ‘등산행사’에 참가했다는 그는 시종 들뜬 표정으로 당시의 소회를 풀어놓는다. 그 곳에서 지낸 일주일에 대해서라면 ‘없는 말주변’을 끄집어내서라도 한껏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겠다는 심사다. 일본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말주변 없는 중년의 사내는 생전 처음 마주한 어린 기자에게 조차 그 애틋한 마음을 고하려 이다지도 애를 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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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21 유수기자 |
〈홀로아리랑〉으로 동포들과 인연… “총련은 내 고향”한돌과 재일동포들과의 인연, 그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일본의 한 PD가 ‘아리랑’을 주제로 다큐를 찍으며 그와 그의 작품 〈홀로아리랑〉을 일본에 소개하는 일이 있었던 것.
“다큐에는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과 함께 〈홀로아리랑〉도 담겼는데, 이 다큐가 일본 전역에 방영된 후부터 이따금씩 동포들과 연락이 닿곤 했지. 그러다 공연기획을 하는 한 동포가 나를 일본에 초청한 일이 있었어. 공연은 못 하겠다고 거절을 했더니 와서 구경만 하라고 하더군.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구경하러 갔다 처음으로 동포사회를 접하게 된 거야.”
이후 그는 재일동포들의 화합을 위한 ‘ONE KOREA FESTIVAL’에 참가하는 등 조금씩 동포들과의 인연을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홀로아리랑〉을 극진히 사랑하는 한 총련 동포’를 알게 되면서 그는 동포들과 보다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처음엔 몰랐지. 어쩌다 그 총련 동포가 등산행사를 구경하러 오라기에 또 구경하러 갔어. 막상 가보니 동포들이 한 300여 명 모였더라고.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고 있으려니까 하필 그 산악팀 주제가가 〈홀로아리랑〉이래. 내 앞에서 턱하니 그 노래를 부르고서는 남측에서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이 왔다고 내 소개를 하는 거야. 참,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입가에 훈훈한 웃음기가 어린다. 그렇게 점점 깊이 총련 동포사회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그는 올해 10월 또 한번 등산행사를 다녀왔다. 도쿄에 머물렀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지방을 두루 ‘순회’했다고.
“등산행사로만 알고 갔는데, 완전 강행군을 하고 온 거지 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계속 이끌려 다녔어. 과로해서 주저앉을 뻔했는데, 글쎄, 술 먹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더라고. 남쪽에서 먹던 대로 하다가는 쓰러진다면서.”
말하자면 그것은, ‘등산행사’란 그럴듯한 이름을 빌린 총련 동포들의 ‘한돌 환영잔치’였던 셈이다. 그 자신만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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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21 유수기자 |
그는 이번 방문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어떤 인연에 의해서였든 일본에 가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만약 가지 않았다면 지금도 ‘이런 느낌’을 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느낌’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않았으나 그것은 그의 표정과 말투를 통해 고스란히 묻어난다. 다름 아닌, 총련 동포들에 대한 애정 그 자체임이.
“알잖아, 총련 동포들? 그들이 외치는 게 ‘조국은 하나다’라는 건데,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 우리라고 어디 조국이 둘인가. 과거 북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동포들의 국적이 북이 된 점, 그런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많아. 예전 같으면 반공교육도 하고 해서 어려웠겠지만, 요즘 같은 때는 어떤 채널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총련 동포들에 대한 오해를) 짚었으면 좋겠어.”
그는 이제 총련 사회가 마치 북쪽에 있는 ‘고향’과 같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우리 아버지 고향이 함경남도 영흥이야. 그런데 요즘 일본에 가면 꼭 북쪽의 아버지 고향에 간 느낌이 들더라고. 그 곳에서 지낸 하루 하루가 모두. …지금 북에 형이 둘, 누나가 하나 살고 있는데, 총련 동포들을 볼 때마다 그이들이 모두 내 형, 누나 같은 거지. 예순 살 먹은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어찌나 천진난만하고 귀여운지, 꼭 우리 형, 누나야. 감동을 많이 받았어. 그 곳에서 지내는 동안 만날 울먹였지 뭐야.”
그는 아직도 오사카 조선학교 아이들이 손님인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40분씩 공연을 펼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부채춤부터 시작해 전통악기 연주 등 각종 장기를 풀어놓던 그 모습이 결코 ‘형식’이 아닌 ‘마음’임이 진하게 느껴졌다고. 답가로 〈홀로아리랑〉을 부르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는 그는 역시 이번에도 그것을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목이 메여 오는 게, 도무지 참을 수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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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21 유수기자 |
“통일? 그냥… 고향에 가고 싶은 거지, 뭐” 생각해보면, 1970, 80년대를 지나는 동안 노래를 통해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랬던 그는 종종 민족이며 통일을 위해 기꺼이 목청을 가다듬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홀로아리랑〉이나 〈터〉, 〈한뫼줄기〉와 같은 곡들만 모아도 ‘꽤’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그는 슬며시 발을 뺀다.
“처음부터 무엇을 담아내기 위해 만든 노래는 없어. 어차피 ‘캐는’ 거니까. 스무 번 산에 오르면 한 곡 정도 캘까. 산에 갈 때 오늘은 뭘 캐야지 먼저 생각하고 가는 것이 아니듯이.”
이쯤에서 그에게 최근 동포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홀로아리랑〉(1989)의 창작 배경을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이야기를 풀어낸다.
“지도를 보다 우연히 한반도 옆에 찍혀 있는 작은 ‘점’을 보게 됐지. 그 점이 독도야. 점을 보는 순간, 어릴 적 체하면 할머니가 손을 따주던 일이 생각이 나. 배가 아픈 데도 손을 따면 금방 낫잖아. 그것처럼 그 점에다 침을 놓으면 허리 아픈 38선이 없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만든 노래지, 뭐.”
남북의 젊은이들이 독도에서 만나 새 해를 맞이하자는 내용의 이 곡을 만들기 위해 그는 5년에 걸쳐 11차례나 독도를 다녀왔다고 한다. 그 특별한 제목에 대해서도 얘기를 덧붙인다. 독도의 ‘독’을 ‘홀로’라는 우리말로 풀어 만든 일종의 합성어라며, 남과 북이 ‘홀로’가 아닌 함께 나아가자는 뜻의 역설적 표현이라고.
한참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는 쉼 없이 이야기를 풀어 가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겸연쩍었는지 허허 웃는다. 그런 후 다시 예의 자세로 돌아와, 어떤 일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민족이며 통일을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학자도 아니고, 애국자도 아닌 내가 함부로 민족이며 통일을 얘기 할 수는 없다”고 못을 박는다.
“그래도 굳이 누가 나더러 통일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한다면, 그저 아버지 고향에 다녀올 수 있다면 좋겠다는 거야. ‘통일’이란 말은 어쩐지 윗사람들의 대화 속에나 나오는, 멀리 동떨어진 말 같아서… 우리 같은 사람이야 그냥 고향에 가고 싶은 거지, 뭐. 통일은 나중에 해도 좋아. 고향에라도 먼저 다녀오게 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의 말대로 ‘피의 유전자’가 있어서일까, 그는 마치 아버지의 고향이 자신의 고향 같다고 말한다. 자신이 태어난 춘천이 오히려 낯설다는 그는 가까운 피붙이 하나 없는 이 땅에서 여태껏 스스로 ‘실향민’으로 살아왔던 셈이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유언이 있는데,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서 형들과 누나를 꼭 만나라는 것이었어. 결코 버리고 떠나온 게 아니라는 말을 꼭 전해야 한다면서. 그 말을 내가 전해야 하는데, 과연 언제가 될지….”
“‘타래’라고 지었어. 재즈나 성악 뭐 그런 것이 있듯이 내가 하는 음악은 ‘타래’라고. 그러므로 내 직업은 ‘타래마니’지. 타래를 캐는 사람이란 뜻이야, 심마니처럼.”
그는 언젠가 ‘타래’를 “몸과 마음 속으로 ‘타고 드는’ 노래의 모음이며 흔히 포크송이라고 불리는 노래들을 향한 나만의 노래양식”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이토록 말과 글에 대해 ‘철두철미한’ 그는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남북의 말이나 글을 통일하여 교육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적인 통일 이전에 먼저 말부터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친김에 그는 남북 모두가 함께 쓰면 좋을 말 하나를 소개한다. 이 역시 스스로 머릿속으로 ‘캐낸’ 것이다.
“화장터 말야. 그 뜻이 ‘사람 죽으면 화장하는 곳’인데, 영 별로잖아. 이 말을 ‘다비움’이란 말로 바꿨으면 좋겠어. ‘모두 비우다’와 집을 의미하는 ‘움’을 합한 합성어로, ‘다 비우고 떠나는 곳’이란 뜻이지. 이렇게 되면 인생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거야. 얼마나 좋아.”
한껏 열을 올리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한 듯, “남들은 생각도 없는데, 만날 혼자만 이런다니까”하며 다시금 허허 웃는다. 그러나 ‘다비움’에 대한 미련을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듯,
“‘다비움’ 같은 말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거니까. 《민족21》같은 매체에서 광고 좀 해 주면 좋겠어. 참, 《민족21》은 북에도 가잖아? 남에서만 쓰면 통일된 후가 힘들어지니까, 북에서도 쓸 수 있도록… 그래서 《민족21》이 좋은 책이라니까.(웃음)”
[82호. 민족21] 박소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