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준태(시인), 그림｜장순복(화가)[47호, 민족21]

 

 

 

 

 

남쪽에서 오랫동안 민족운동을 펼친 함석헌 선생은 말한다. “한국이라는 이 거문고가 내는 소리는 어떤 소릴까? 장엄인가? 웅대인가? 기쁨인가? 슬픔인가? 황홀인가? 침통인가? 우리 역사의 바닥소리는 무엇인가?” 라고 물은 다음에, 그 답으로 첫째 기후와 토질에 해당하는 지리를 꼽는다. 둘째로는 과일나무에 해당하는 민족의 특질을, 셋째로는 이 민족으로 하여금 이 땅 삼천리반도에서 수수만년 그때부터 역사를 누려오게 해오고 있는 한울님의 뜻을 꼽고 있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그 어떤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산과 강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하늘은 사람의 성정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아, 누대천년 비바람 눈보라를 이겨내고 이 땅을 지켜온 백두산의 후예 한반도 사람들! 바로 여기 태어나서 다시 어머니의 품속으로 아득히 돌아간 사람들! 하여 후손들이 영원히 살아가게끔 오늘을 열어놓은, 먼 옛날부터 ‘흰옷 물결’로 넘실거려온 배달겨레의 사람들…. “백두산은 남북 7500만 온 겨레의 고향”이다. 온갖 꽃들의 향기가, 툰드라지대 특유의 수종인 이깔나무, 가문비나무의 푸르름이 온몸을 파고드는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혼을 육질화 시켜주기에 족하다. 해발 2744m를 자랑하는 백두산 최고의 봉우리 장군봉을 올라서면 더욱 그러한 감동이 솟구쳐 온몸이 마치 깃발처럼 펄럭인다.

 

백두산은 24개 봉우리가 ‘천지’를 웅혼한 빛으로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그 봉우리들 모두가 해발 2500m 이상이다. 노래부르듯 열거하면 최고봉인 장군봉을 위시하여 비루봉·향도봉·쌍무지개봉·자암봉·화개봉·철벽봉·천문봉·자하봉·천황봉·용문봉·관일봉·금병봉·지반봉·백운봉·옥주봉·마천우·제운봉·낙원봉·와호봉·관면봉·제비봉·단결봉·해발봉이 끝간데 없이 펼쳐진 저 영세불멸의 하늘과 일월성신을 떠받들고 있다. 이들 봉우리가 ‘하늘연못’처럼 껴안고 있는 천지는 최대 깊이가 373m이며 사방 둘레 12km이다. 

 

백두산에 붙여진 이름들은 다양하다. 백산, 개마대산, 장백산, 불함산, 종태산, 도태산, 태백산, 태황산, 영응산, 적선산, 노백산, 단단대령, 가이민상성아린산 등이 그것이다. 불함산이란 기록은 중국 최고 기서 《산해경》에 나온다.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선 태백산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세종 때 정인지 등이 펴낸 《고려사》에서 비로소 ‘백두산’이란 이름이 정착된다.  

 

우리 한민족의 영원한 영봉인 백두산! 우리 민족의 알파와 오메가, 나아가 궁극을 이루는 백두산! 수만년 전부터 빛나는 눈동자로 우리를 응시해오고 있는, 우리 민족의 오매불망 염원인 ‘통일의 그 날’을 먼저 침묵으로 말해주고 있는 신앙과도 같은 백두산! 여기에 오르면 아득히 무화된 역사마저 다시 몸에 달라붙어 살아난다. 여기에 오르면 이미 당도한 사람들과 함께 누구나 무엇인가에 접신되고 만다. 온몸이 전광석화에 찔린 듯이 지, 지, 지, 소리내며 빛을 뿜으니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 근참기〉에서 술회한다.
“백두산은 동방의식의 최고 연원입니다. 동방 대중의 원적이었습니다. 이 땅은 백두산을 만다라로 하여 일체가 구현되었으며, 백두산을 선과 축으로 하여 일체가 계획되었습니다. 백두산은 읽고 읽어도 다 할 날이 없고, 알고 알아도 끝날 날이 없는 신에게서의 대계시(大啓示)요, 동방 사람들의 살아있는 경전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비극의 주인공들이 당도한 백두산은 비장함을 보여주는 시를 남긴다. 수양대군(세조)에게 맞아죽은 충신 김종서와 예종 때 유자광 일파에게 죽임을 당한 남이장군의 시가 바로 그거다.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 썩은 저 선비들아 우리 아니 사나이뇨 / 어찌타 능연각 위에 뉘 얼굴을 그릴거나.”(김종서)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다 없애고 / 두만강 물도 말 먹여 다 말리겠네 /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 뉘라서 뒷세상에 대장부라 하오리.”(남이장군)

두 편 모두 자신들의 앞날을 예언한 시 같다.

느끼는 사람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변한다는 ‘천지’를 굽어보면 우선 가슴 속이 서늘해진다. 천지는 중국 쪽으로는 송화강의 원류이며 한반도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시원이다. 우리 땅 북쪽의 삼지연공항 가는 길목을 지나노라면 압록강의 시원 혹은 발원을 이루는 폭포가 보인다. 수많은 꽃들이 피어난 협곡 사이로 압록강은 그렇게 시작되어 흘러간다. 아아 가슴 저 밑바닥까지 쿵쿵쿵 울려 퍼지며 흘러가는 압록강 물줄기!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노라면 우리들 우매한  가슴 속에도 어느새 기나긴 분단의 역사가 흡사 눈보라처럼 휘몰아쳐 온다. 

 

우리 민족 만고불변의 영산 백두산은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많은 시인들이 노래하여 왔다. 아니 시인들이라면 누구나 백두산을 노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앞을 다투어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남쪽은 〈애국가〉 첫 구절부터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시작되고 있으며 북쪽의 경우는 최고의 혁명송가로 널리 불려지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 또한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만큼 백두산은 먼 옛날부터 이 땅 한반도에 살아온 배달겨레의 육신과 넋 속에 결연한 ‘민족혼’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절대적 영원성의 최정상을 의미한다.

 

북쪽 시인 조기천이 남긴 대서사시 〈백두산〉도 일단은 그 범주에 든다. 물론 이제는 남쪽에서도 알려질 만큼 알려진 〈백두산〉은 항일 서사시이다.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승리로 기록되고 있는 ‘보천보전투’를 배경으로 머리시와 7개의 장, 맺음시로 구성된 3000행에 달하는 장편 서사시이다.

 

줄거리는 항일유격대장인 김 대장의 지도 아래 주인공인 철호가 일제 강점기에 놓인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정찰자료 수집, 비밀선전물 작업, 솔개월의 꽃분이와 그의 아버지 윤칠 노인과 과업수행을 하는 과정을 거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밑그림이다. 따라서 중심 줄거리는 철호와 같은 민중들의 ‘민족과 역사에 대한 투신’의 결과 김 대장이 보천보 유격전투가 성공하게 되었다는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을 남쪽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조기천의 “〈백두산〉은 그 앞머리부터 역사적인 현실성으로서의 평범성(곧 민중성)과 초자연적인 영웅성이 조화를 이룬 채 장엄하게 묘사”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이 조화로운 자연묘사는 영웅주의와 민중성을 하나의 역사적 진보의 작용으로 보려는 시인의 의도가 낳은 결과”라고 분석한다. 

 

아무튼 통일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남북 이데올로기 차원을 넘어서서 다시 읽게 되는 조기천의 〈백두산〉은 그 자체가 항일무장투쟁의 대서사시로서 뿐만이 아니라 ‘열린 남북통일문학사’의 재정리 차원에서라도 주목할 작품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영광의 역사만이 역사가 아니라 상처의 역사도 분명히 우리의 역사라는 생각을 지금쯤은 재해석·재정리하여야 할 단계가 우리 앞에 숙제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사시 〈백두산〉은 비장미, 화려미, 웅장미, 구성미, 민요성(ballad), 자연묘사는 역시 지금까지 발표된 작품들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장대하다.

 

 

 1913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가족을 따라 시베리아로 이주, 옴스크의 고리키사범대학을 졸업했다. 1945년 북으로 귀국한 뒤 서정시 〈두만강〉(1946), 장편대서사시 〈백두산〉(1946) 등을 발표했으며 6·25전쟁에 종군작가로 참가, 〈조선은 싸운다〉 〈불타는 거리에서〉 등을 발표했다. 1951년 3월 조선문학예술동맹 부위원장에 피선되었으나 1951년 7월 31일 평양에서 미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북 문학사에서는 〈백두산〉을 “우리나라 시 문학발전에 커다란 의의를 갖는 서사시의 최고 걸작”이요 “현대서사시 문학형식 발전에서 나서는 문제를 빛나게 해결”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