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춥더니 벌써 1월도 거의 지나가고 있습니다. 작심삼일이라고 하는데 새해에 세웠던 계획을 내던지신 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다지고 다시 힘차게 시작해도 좋을 듯합니다.

새해를 맞아 먹는 음식으로는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를 가진 흰 떡국도 있지만 조화로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먹는 ‘구절판’도 있습니다.

구(九)절판의 ‘9’라는 숫자는 동양에서 ‘충만함’을 뜻합니다. 또 구절판은 8방에 나뉜 재료를 밀전병에 싸서 먹는데, 이는 서로 다른 뜻을 가진 사람들의 ‘화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9’자를 재수가 좋은 숫자로 여겼습니다. ‘9’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숫자로서 ‘구(九)족’하면 모든 백성, ‘구(九)중천’은 우주를 뜻합니다.

비칠 정도로 맑고 투명한 밀전병에 8가지 각종 야채와 고기 등을 싸먹는 ‘구절판’은 보기에도 그 어떤 요리보다도 아름답지만 입 안에서 밀전병의 부드러움과 함께 재료 각각의 맛과 향이 어우러져 그 맛 또한 일품입니다.

이런 구절판은 지역, 계절에 따라 담는 재료들이 약간씩 달라지는데요, 대개 진 구절판과 마른 구절판 두 종류로 나뉩니다.

진 구절판은 미나리·오이·달걀지단(노른자와 흰자)·전복·해삼·새우·삶은 닭고기·쇠고기·표고버섯·석이버섯·느타리버섯·도라지 중에서 계절과 기호에 맞춰 8가지를 선정, 길이가 같게 가늘게 썰어서 기름에 볶아 빛깔을 맞춰 차례로 놓고, 중앙에는 밀가루에 달걀흰자를 섞어 종이처럼 얇게 부친 전병을 둥글게 오려서 담아냅니다.

먹을 때는 전병에, 둘레에 담은 볶음요리를 조금씩 놓고 싸서 초간장이나 겨자초장에 찍어 먹습니다.

이에 반해 마른 구절판은 마른 안주만을 담은 것으로 여러 가지 육포·어포·마른 새우 등에서 8가지를 골라 담고 중앙에는 보통 생밤을 담습니다.

구절판은 재료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고유한 오방색인 노란색, 붉은색, 녹색, 흰색, 검정색 등의 음식이 모두 모인 것이 기본입니다. 구절판은 이렇게 여러 가지 음식을 한꺼번에 섭취하다보니 영양학적으로 뛰어난 음식입니다.

지금은 구절판이라고 하면 음식을 지칭하는 의미가 더 크지만 원래의 구절판이란 말은 둘레에 8개의 칸과 가운데 1개의 칸으로 모두 9가지를 담을 수 있게 되어 있는 목기를 가리켰고, 대개 나전칠기로 만들어진 그릇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절판의 유래를 꼽자면 밀쌈을 꼽을 수 있습니다. 『동국세시기』에는 궁중이나 반가에서 유월 유두의 시식으로 밀쌈을 즐겨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의 구절판 모양으로 먹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신라시대 유적인 경주 155호 고분에서 구절판 모양의 칠기가 출토되었는데 당시에도 이 그릇을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중국에도 ‘춘병’이라는 밀전병을 싸먹는 음식을 담을 때 쓰는 구절판과 같은 모양의 용기가 있는데 이를 통해 조선시대 사신들이 중국을 오가면서 먹던 것을 우리나라에 와서 개발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구절판은 궁중음식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조선시대 궁중의 잔치기록인 『진찬의궤』나 『진연의궤』에는 전혀 나오지 않으며 구절판이라는 이름으로 문헌에 소개된 것은 1900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조선시대 마지막 주방 상궁인 한희순 상궁의 제자인 황혜성 교수가 쓴 『조선요리개략』에는 구절판이 술안주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때에는 전병을 밀가루 뿐 아니라 메밀가루 찹쌀가루로 얇게 부쳐서 칸에 담았다고 합니다. 또 가장자리에는 애호박나물, 표고 또는 목이나물, 석이나물, 제육편육, 당근나물, 숙주나물 또는 미나리나물, 달걀지단을 황백으로 나누어 부치고 육회용 고기나 볶은 콩팥, 처녑, 양 볶음 등을 담았으며 따로 초장을 곁들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나온 『이조궁정요리통고』에서는 쇠고기와 전복을 넣었고 매운맛을 내는 겨자를 한데 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자호의 『조선요리법』에서는 메밀가루로 전병을 부치고 가장자리에는 양, 처녑, 콩팥, 무, 숙주, 미나리, 표고, 석이의 여덟 가지 재료를 각각 볶아서 담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제육편육이나 소 내장류는 전혀 넣지 않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구절판에 넣는 재료들이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절판은 요리법이 어렵지는 않지만 손이 많이 가는 정성스러운 음식이기 때문에 귀한 손님들을 대접하곤 할 때 많이 활용되곤 하는데요,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난 2차 정상회담에서도 우리 측이 주재하는 만찬에 구절판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좋아한다는 드라마 ‘대장금’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구절판은 특히 그 모양과 맛에 외국인들이 극찬을 하곤 하는데요, 소설 ‘대지’로 유명한 작가 펄벅 여사가 내한했을 때 구절판을 보고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작품을 파괴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합니다.

보기에도 먹기에도 좋은, 아름다운 구절판이 여러분 모두에게 새해에 행운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통일뉴스]2010년 01월 22일 (금)

김양희 기자